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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국가유산 방문코스1

왕가의 길

국가유산 방문코스1에서 만나는 12개의 국가유산 방문지

방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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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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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유산 방문지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 23

    스탬프: 남한산성 행궁방문자센터,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도장만)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렬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신한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순식간에 한양으로 진격해 온 청의 군대는 한강을 건너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 있던 식량은 두 달 분량도 되지 않았다. 고립무원 상태로 버티던 조선은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을 스스로 걸어나온 인조는 청의 군대가 머물고 있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서울 삼전도비다. 패배의 역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남한산성 자체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킨 이곳은 673년(신라 문무왕 13년)에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고쳐쌓은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이 진행됐는데, 특히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교류와 서양 무기의 도입은 남한산성 축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지어진 성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동·서·남문루와 방어시설, 군사훈련시설, 관청 등이 남아 있다.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남한산성 행궁 사적이 있다. 정무시설뿐만 아니라 종묘사직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까지 있는 이곳은 남한산성이 유사시에 임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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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유산 방문지

    수원 화성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스탬프: 수원화성박물관 안내데스크 (매주 화~일, 09:00 – 17:00, 17시 이후 스탬프를 찍을 수 없습니다.)

    조선 제22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 화산(현재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다. 화산 주변에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제공하고 당쟁 근절 및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1796년(정조 20년) 팔달산 아래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었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와 문신 채제공의 감독으로 축성된 수원 화성은 거주지 기능과 방어 기능, 상업 기능이 합쳐진 성곽도시였다. 동서양의 과학기술과 건축술이 총동원된 이 계획도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주변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성곽에는 공심돈, 포루, 노대, 봉돈, 암문 등의 시설이 방어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벽돌로 만든 요새임에도 우아하고 세련된 인상을 풍기는 이유는 전면에 반원 모양의 옹성을 축조한 수원 팔달문,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고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화홍문, 군사지휘소 겸 휴식공간인 수원 방화수류정 등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 덕분이다. 특히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수원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로 꼽힌다. 성 안에는 수원 화성행궁 사적이 자리하고 있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말하는데, 화성행궁은 전국의 행궁 중에서도 규모와 격식, 활용도 면에서 으뜸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였지만 평소에는 관청으로 사용됐다.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서는 1795년(정조 19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되기도 했다. 수원 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수원 팔달문: 수원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는데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 방화수류정: 1794년(정조 18년)에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 수류정은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1848년(헌종 14년)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수원 화성행궁: 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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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유산 방문지

    종묘

    서울 종로구 종로 157 종묘공원

    스탬프: 종묘 내 수표소

    조선의 왕과 왕비,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1394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유교에 뿌리를 둔 조선왕조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가장 먼저 지었다. 이는 종묘가 국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제향 공간의 중심인 종묘 정전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단일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처음 지었을 땐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공간이 부족해지자 옆으로 점점 늘려 현재에 이르렀다. 별도의 사당인 종묘 영녕전은 태조의 선대 4조와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간결하고 담백한 건물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종묘제례 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대제(大祭)’라고도 부르는 종묘제례는 엄격한 유교 절차에 따라 장엄하게 진행된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을 종묘제례악(국가무형유산,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이라 한다. 연주, 노래, 무용이 어우러져 있는 이 음악은 완전하게 전해지는 왕실의 제사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종묘 정전: 조선 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이다. 종묘 영녕전: 종묘의 일부로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종묘제례: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키며, ‘대제(大祭)’라고도 부른다. 종묘제례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어, 정시제는 4계절의 첫 번째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지냈고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지냈으나, 해방 후부터는 5월 첫 일요일에 한 번만 지내고 있다. 종묘제례악: 종묘제례를 지낼 때 무용과 노래와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키며,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종묘제례악은 본래 1447년(세종 29년) 궁중회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창작하였으며 1464년(세조 10년) 제사에 적합하게 고친 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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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스탬프: 창덕궁 매표소, 카페 사랑 창덕궁(내부)

    1405년(태종 5년)에 세워진 조선의 별궁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렸으나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복궁의 건물들이 일직선상에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반면, 창덕궁은 자연지형에 맞춰 제각기 다른 형태로 자유롭게 지어졌다. 특히 왕실의 정원인 후원은 인공적인 건축물마저 숲의 일부로 보일 만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창덕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의 정문이자 외전이 시작되는 창덕궁 돈화문은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었다. 어진 정치를 펼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창덕궁 인정전(국보)은 즉위식, 결혼식, 세자 책봉식, 외국 사진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겉에서 볼 땐 2층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층으로 되어있는 실내에는 아름다운 천장과 인상적인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후원 초입에 위치한 부용지에 다다르게 된다. 창덕궁에 있는 연못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이곳엔 창덕궁 부용정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하게 만든 이 독특한 건물은 한국 정자 건축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부용지 건너편에 있는 언덕에는 2층짜리 누각인 창덕궁 주합루가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어진 주합루는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1층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었고 2층은 사방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열람실이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으로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인 이 연못의 남쪽 변에 부용정이 자리잡고 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1707년(숙종 33년)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후원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로 정조의 정책 개발과 개혁 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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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융릉과 건릉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스탬프: 융릉과 건릉 매표소 뒤 수표소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고,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27세의 나이에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한 뒤, 배봉산 기슭에 있던 무덤을 1789년(정조 13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했다. 당시에는 현륭원으로 불렸지만, 1899년(고종 36년)에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어 융릉으로 승격되었다.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던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 황후’로 추존되었다. 추존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을 말한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에 무색할 정도로 장중하고 화려하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된 섬세한 병풍석을 둘렀고, 능 앞에는 팔각형과 사각형의 석등 양식을 결합한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의 불을 밝히는 장명등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장명등은 조선 왕릉에 있는 장명등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융릉 동쪽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821년(순조 2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봉분에 난간석만 둘렀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융릉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능 입구로 들어가서 걷다보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은 융릉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건릉으로 이어진다. 매년 4월에는 융릉 제향이, 5월에는 건릉 제향이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빼곡한 숲길은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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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집

    서울 중구 퇴계로36길 10 한국의 집

    스탬프: 카페사랑_한국의 집

    한국의집은 1957년 국내외 귀빈을 위한 영빈관으로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이후 대대적인 개·보수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거쳐 현재 한국의집은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보존 및 보급하기 위한 고품격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통한식, 전통예술공연, 전통혼례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비즈니스 행사나 촬영 등을 위한 대관장소로도 이용할 수 있다. 내·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전통문화 복합문화공간인 한국의 집 내 취선관 1층에 위치한 사랑_한국의집 아트샵앤카페는 전통문화를 응용하고 한국적 조형미를 살려 전통공예기법에 따라 제작한 다양한 상품들과 전통 음료, 다과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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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고인돌 유적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스탬프: 고인돌 앞 안내소

    고인돌은 몇 개의 받침돌을 고이고 위에 넓적한 돌을 덮은 것을 말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전 세계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주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한반도에는 4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숫자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고인돌 가운데 밀집 분포도가 높고 형식이 다양하며 보존 상태가 좋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기에 포함된 강화도의 고인돌은 70여 기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이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탁자식은 땅 위에 판석을 세워 돌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것이고, 바둑판식은 땅 아래 판석을 세워 돌방을 만든 다음 땅 위에 조그만 고임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탁자식 고인돌은 주로 북쪽에서 발견되는 반면, 바둑판식 고인돌은 주로 남쪽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각각의 고인돌을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전체 높이가 2.6m, 덮개돌의 길이가 6.5m에 이르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2개의 대형 고임돌 위에 얹혀 있는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는 부근리 지석묘는 선사시대의 문화와 기술, 사회구조, 정신세계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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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전등사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스탬프: 전등사 남문 매표소 앞, 동문 매표소 앞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장소가 있다. 하나는 마니산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 삼랑성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은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외곽 방어 기능을 담당했다. 삼랑성 안에 위치한 전등사는 강화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381년(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때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의 전등사로 바뀌었다. 이후 몇 차례의 화재를 겪으며 건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1625년(인조 3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지만 전등사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정족산성 안에 조선왕조실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년)에는 이곳에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고, 이듬해에는 50명 승군(僧軍)을 두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전등사에는 귀중한 국가유산이 많다. 유려한 곡선과 화려한 장식이 고풍스러운 대웅전, 중국에서 건너온 철종, 조각 수법이 뛰어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전등사 서쪽에는 실록을 보관하던 강화 정족산사고지가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강화 삼랑성: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삼랑성은 1660년(현종 1년)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는 편년체 방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정족산사고본을 기준으로 볼 때 완질 분량이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1621년(광해군 13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을 사람 모습으로 조각해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강화 전등사 철종: 일제 강점기 말기 금속류의 강제 수탈 과정에서 중국에서 건너왔으며, 광복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형태와 조각 수법에서 중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종으로 한국의 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조선 후기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강화 정족산사고지: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내에는 수호사찰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기 때문에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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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9

    국가유산 방문지

    경복궁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스탬프: 경복궁 동궐마루 사랑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95년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을 완성했다. 도성 북쪽 북악산 기슭에 있는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하는데, 고대부터 전해오던 도성 건물 배치 형식을 따라 궁의 왼쪽에는 종묘가, 오른쪽에는 사직단이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원래 사정문(四正門)으로 불렸으나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왕실의 권위가 느껴지는 당당한 궐문 안쪽에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업무를 보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로는 경복궁 근정전이 있다. 궁궐 안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근정전은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왕실의 상징이자 경복궁의 중심이다. 궁궐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과 휴식공간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 있는 연못에는 경복궁 경회루가 있다. 연회 장소로 사용된 경회루는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운치있는 모습으로 인해 궁궐 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힌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던 경복궁은 고종 때인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다시 세워졌다. 중건된 경복궁은 처음 지어졌을 때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다. 그러나 정전과 누각 등 주요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복원 사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비록 많은 건물이 없어지긴 했으나 처음 지어진 자리에 있는 법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조선 전기의 여러 왕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했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복궁 경회루: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연못을 넓히며 크게 다시 지었고.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유지되어 오다가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 광화문에서는 조선시대 왕실 호위문화를 상징하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루 두 번 실시하고 있다. 2002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조선시대 왕실 호위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통문화행사다. ‘조선왕조실록’ 예종(睿宗) 1년(1469) 수문장제도의 시행 기록을 역사적 근거로 하여 재구성된 이 행사는 당시의 복식 및 무기 등을 복원하여 조선 전기(前期)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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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0

    국가유산 방문지

    김포 장릉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스탬프: 정문 매표소 옆 수표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당대의 사상과 장묘문화, 자연친화적 구조와 예술성이 압축되어 있는 국가유산이다. 풍수 사상을 기초로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정했는데, 이는 ‘도읍지의 사대문 10리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법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왕릉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강원도 영월과 북한 개성 등 예외적인 장소에 조성된 경우도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장릉’으로 불리는 능은 총 3기가 있다. 영월에 있는 제6대 단종의 능, 파주에 있는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 그리고 김포에 있는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 그것이다. 김포 장릉의 주인인 원종은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로로 호성공신이 되었으나 1619년(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년)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장릉산 자락에 자리한 김포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 왕후의 능이다. 추존된(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 죽은 후에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라 봉분 아랫 부분에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것이 조선왕릉의 특징인데, 이곳 역시 아름다운 풍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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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1

    국가유산 방문지

    종묘

    서울 종로구 종로 157

    스탬프: 종묘 내 수표소

    조선의 왕과 왕비,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1394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유교에 뿌리를 둔 조선왕조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가장 먼저 지었다. 이는 종묘가 국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제향 공간의 중심인 종묘 정전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단일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처음 지었을 땐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공간이 부족해지자 옆으로 점점 늘려 현재에 이르렀다. 별도의 사당인 종묘 영녕전은 태조의 선대 4조와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간결하고 담백한 건물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종묘제례 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대제(大祭)’라고도 부르는 종묘제례는 엄격한 유교 절차에 따라 장엄하게 진행된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을 종묘제례악(국가무형유산,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이라 한다. 연주, 노래, 무용이 어우러져 있는 이 음악은 완전하게 전해지는 왕실의 제사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종묘 정전: 조선 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이다. 종묘 영녕전: 종묘의 일부로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종묘제례: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키며, ‘대제(大祭)’라고도 부른다. 종묘제례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어, 정시제는 4계절의 첫 번째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지냈고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지냈으나, 해방 후부터는 5월 첫 일요일에 한 번만 지내고 있다. 종묘제례악: 종묘제례를 지낼 때 무용과 노래와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키며,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종묘제례악은 본래 1447년(세종 29년) 궁중회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창작하였으며 1464년(세조 10년) 제사에 적합하게 고친 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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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2

    국가유산 방문지

    강화역사박물관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스탬프: 강화 역사박물관 1층 안내데스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부근리 고인돌(지석묘)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은 소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유물을 전시 · 연구 · 수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선사시대 화살촉에서부터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 근현대 목가구 등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을 상설전시 및 기획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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